김나하늬




 

 

1.

독일에 온 지 3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그간 인종에 따라 직업이 다른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터키에서 온 이민자들은 케밥 가게 혹은 택시 기사를 많이 하며, 베트남에서 온 이민자는 아시아 음식 식당을 많이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등 아시아계 여성들이 마사지 숍, 네일아트 숍에서 일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흔히 보이는 네일아트 숍들을 눈여겨보면서, 이곳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겸 숍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단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쌓아온 네일아트 실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어떤 찜찜함이 나를 덮쳐왔는데, 이 찜찜함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

우리는 종종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을 작은 외면적 특징만으로 구별할 수 있다. 쉽게는 옷을 입는 스타일이나 화장법 등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했던 관찰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세 나라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미세먼지 심각도가 낮은 일본에서는 마스크 착용의 목적이 자신의 기침이 다른 사람에게 닿지 못하게 막는 데 있다. 중국인들은 일회용이 아닌 조금 더 값이 나가는 다회용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마스크 아예 안 끼는 부류 혹은 코를 더 잘 덮는 일회용 미세먼지 방지 마스크를 챙겨 끼는 부류로 나뉜다. 마스크를 낄지 말지, 낀다면 어떤 종류를 착용할 것인지를 선택할 때도 국가 간 차이가 발생하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국가적인 차원의 보건정책으로 공기 오염에 대응하는 방식, 미디어에서 공기 오염을 다루는 정도와 횟수, 문화적으로 외모에 부과하는 기준, 실제로 생산되는 마스크의 종류 등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대상화를 통한 분류는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특징과 인격을 소거하지만 용이한 분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상화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라오면서 내가 부당하다고 느꼈던 대상화들은, 그를 통해 한 인격의 복잡다단한 면을 지배 담론이 만들어 낸 단일한 분류체계로 환원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회에서 나는 미적 기준과 관련해서 나의 외모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았다. 나의 외모는 어떻게 읽히는지, 나는 어떻게 대상화되고 있는지, 외부의 피드백과 재현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치마와 긴 생머리를 둘렀으면 여성스러운 시스 젠더 헤테로 섹슈얼로 읽히는 동시에 일 처리 능력을 의심받는다. 바지와 빡빡 머리는 엇나간 열등감의 발로로 읽히기 쉽다. 외면에 부여된 상징성들이 내가 속한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와 값으로 거래되고 읽히는지를 오랜 시간에 거쳐 이해하고, 분노하고, 내가 내린 선택을 감수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겪었다. 평생 지속하는 이 공공연한 거래 속에서 어떤 이들은 피어싱을 하고 부러 거친 말투를 쓰고, 어떤 이들은 다이어트를 하고, 어떤 이들은 붉은 립스틱을 바른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그 자체로 대할 방법이란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마주할 때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거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관찰을 빌어먹고 그 관찰에는 외면성이 반드시 포함되며 그 외면은 이미 짜인 판위에서 내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배치한 결과이다. 그래서 나는 외면이라는 것을, 내가 읽히길 원하는 방향으로 타인을 안내하기 위해 겉면에 힌트들을 나열해가는, 흥미롭진 않지만 해야 하는 거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참여가 강제된 이 거래에서 나만의 기준과 규칙을 세워야만 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은, 내가 외면적 상징을 둘러나갈 때 그것이 나의 내면을 존중받도록 지켜줄 만한 값인가, 아닌가였다.

 

 

 

3.

그러나 한 대륙을 이동해왔더니, 선택지의 범주에 넣어보지 않았던 인종이라는 값이 가장 큰 고정 값으로 작용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만약 내가 네일아트 숍에서 일한다면, 이는 분명 나의 내면적인 기질과 소질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나는 동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이곳 독일에서 네일아트 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동아시아 여성들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성인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순간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형적인 직업군 분포에 확고한 예시 하나가 되어 들어맞게 될 것이다. 특정 직종과 인종의 연결고리와 나의 특성이 겹치는 자리에서 나의 의지와 소질은 결론적으로 전형화된 이미지로 환원된다.

 

이곳에서 아시아 여성이란 외면성은 나의 내면성을 보호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쏟아지는 시선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거리에서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많은 이들, 그들의 행위는 제도적, 문화적, 관습적, 국가 무력의 차원에서 이러한 대상화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주체와 객체 양자 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내가 불쾌감을 드러내는 일은 문제 제기나 저항이 아닌 미비한 리액션으로 치부될 수 있다. 지금까지 겪었던 대상화와 관련된 경험의 판도를 바꾸는 또 다른 차원의 축이 생겨났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는 내가 내리는 많은 선택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형성의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간다. 내가 이곳에서 의미와 상징이 거래되는 방식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속도가 더 붙는다.

 

예를 들어 보겠다. 독일 사람 중 많은 이들은 일상생활에 테크놀로지가 침투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오래된 것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을 중시하며 디지털적인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전자 현관 키가 대중화된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 열쇠로 집 문을 잠그고 연다. 그런 와중의 나는 어학원에서 모든 필기를 아이패드로 했다. 이런 나를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신기해하거나, 이유를 궁금해한다. 그 질문들 속에서 나는 이들이 재빨리 나에 대한 편견을 갖춰나가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들에게 아시아는 개발 도상국이기에, 과시적인 소비를 하도록 부추기는 천민자본주의 국가들이다. 내가 아이패드를 가지고 필기를 하는 것은 그런 아시아에서 왔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진다. 속된 말로 아시아인이 아이패드를 쓰면 졸부지만, 독일인이 아이패드를 쓰면 프로페셔널한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마음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한다. 이것은 인종과 무관한 나의 개인적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학원 사람들과 같이 놀러 나가지 않는 것은 내가 이들에게 흥미가 없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놀 줄 몰라서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된다. 이렇게 맥락과 배경에서 뚝 떼어낸 차이 그 자체를 본질화하고 자연화하는 것이 인종주의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피부로 깨닫게 되었다. 이런 식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건 아시아인이라서 그렇다는 이유가 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상투적 이미지 그 자체가 된다.

 

개인은 그것이 반작용이든 내면화이든,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네일아트 노동자라는, 외면성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내 선택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 떠올리게 됐다. 불가항력적인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저항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테다. 대상화된 시선을 학습시키는 방식만으로도 한 개인이 내릴 선택 자체를 재고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이렇게 대상화는 억압의 방식으로 자신의 위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4.

내가 했던 영상 작업 중에서 꽃과 여성 신체가 많이 등장한 작업이 있다. 이 이미지들이 여성성과 관련해서 읽어내기 쉬워서 여성성 혹은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들을 몇 번 받았었다. 답변을 고민하면서 낸 결론은, 여성성이 특수하게 정의되어야 하고 그 정의 속에 어떤 본질이 있어서 그곳으로부터 작업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는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번 특수성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 또한 반대편을 공고하게 만드는 일이 될까 봐 경계하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 부과된 여성성이 상상적이고 허구적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과 관계해 온 것은 자명하다. 그 관계의 경험은 단일하지 않다. 불화일 때도 있었고 거래일 때도 있었고 억압일 때도 있었고 온전한 수행일 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이곳에서 작업하게 된다면, 나는 또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이 왔을 때 또한, 내가 그 정체성을 거부하느냐 마느냐 하는 나의 다짐 따위로 내 자리를 지정해 주는 구조의 작동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저항이 작동하는 예외적인 상황을 만드는 연대의 순간이 늘 나와 함께하는 것도 아닐 테다. 현재로선 내 인종과 성이 어떻게 함께 읽히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의 규칙을 차츰 깨닫게 될 것이지만, 그 과정은 불쾌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거래되는 방식을 알게 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내리는 선택들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알게 되기까지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를 통해 나의 대응 방식에 대한 믿음도 생겨났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나를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이미지로 만드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맺는 관계를 배짱 있게 다룰 지혜가 나에게 생겨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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