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사운드(그 자체는) 사실상 이미지보다는 하나의 텍스트-언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전자음을 기반으로 보면, 회로에 명령을 입력하면 사운드는 거기에 맞는 결과를 내놓는다. 간단한 예로, 감산 혼합 방식의 신디사이저에서는 주파수와 파형의 형태 등을 설정한 신호를 오실레이터(Oscillator)에 입력하면 오실레이터는 그 신호를 받아 쏘아 보냄으로써 진동을 만든다. 오실레이터가 만든 진동에서 필터(Filter)를 이용하여 일부 주파수를 깎아내면서 소리를 변형하고, 최종적으로 앰프(Amp)를 통해 신호를 증폭하여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러한 과정을 회로 설정을 통해서 여러 번 중첩하거나 추가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운드의 파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파형의 생김새가 가장 기본의 사인파(Sine Wave)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또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했는지를 보며, 어렴풋이 소리를 상상하거나 읽어내거나 혹은 역추적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이론에 기댄 무모한 상상이다. 하지만 이 상상의 방식은 프로그래머가 코딩을 실행시키고 분해하며 오류를 찾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고, 언어학자들이 역사 언어학에서 언어의 뿌리를 찾는 과정과도 멀지 않을 것이다. 사운드 디자인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언어로 말하기라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앞의 이야기들은 소리가 아주 단순하고 규칙적인 파형으로 시각화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제외하고 과학적이거나 수학적이거나 또는 예술적인 방식으로라도, 하나의 교환 가능한 언어로서의 사운드를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나는 이러한 상상을 조금 더 러프하고 비약적으로 이동시켜 보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내가 사운드와 관련된 영역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사운드가 타인과의 공감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이 글의 많은 부분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아주 개인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줬으면 한다.




 

공감1

사운드 아트 혹은 음악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 중 하나는 사운드의 공간감이다. 이 말의 방점은 ‘공간’이 아니라 ‘공간감’이라는 데에 있다. 관객이 소리가 얼마나 자신과 가까이서(정말 여기서/저기서 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난다고 느끼는지, 소리가 나는 공간이(그런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면서) 얼마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지, 소리가 어디로 이동하고(나를 지나치고 있다고 느끼면서) 있는지.. 공간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관객이 마치 어디론가 이동했거나 그 주변에서 무언가가 운동하고 있는 것처럼 신체적인 환영을 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술쇼의 현장과도 같다. 관객은 쇼에 입장하면서 마술은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결국엔 트릭을 알든 알지 못하든, 관객은 쇼가 끝나고 나서까지 사라진 비둘기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마법이 아니라면 비둘기는 어디를 다녀온 걸까?).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내가 듣는 이 소리는 실제로 헤드폰 안의 작은 마그넷과 얇은 코일의 진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신체는 어쩔 수 없이 속는다. 사운드는 기초적인 신체 감각을 건드리고, 그 감각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이다.


 

헤드폰이 아니라 스피커로. 조금 더 오픈된 사운드 시스템으로 나와보자. 사운드 시스템의 변화에는 관객의 변화가 따라온다. 소리를 방류하는 방향이 귀가 아니라 공간을 향하면서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관객이 동시에 유사한 체험이 가능해진다. 스피커를 통해서 삐--.. 뿌--.. 이라는 두 번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상상해보자. 그 소리가 삐-삐- 가 아니라 삐와 뿌일지라도, 청자는 소리가 끊긴 순간 두 소리의 연속성이 상상 가능해진다. 소리가 있음과 소리가 없음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간격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소리는 박 또는 비트가 된다. 박은 옆 사람과 내가 함께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기에 아주 좋은 예이다. 예를 들면,

딱---/딱---/딱---/딱--- 이 반복되는 상황에

--*- / --*- / *--* / ---- /... 과 같이 까딱이기는 (물론 불가능은 아니지만) 어렵다.

모든 사람이 꼭 딱이라는 박에 맞춰 까딱이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라는 박자가 일정한 속도로

돌아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에 맞춰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장에서 핸드폰 플래시를 든 손을 함께, 같은 리듬으로 흔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공1

동시에 같은 사운드를 공유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공간 또한 확장한다. 그 장소가 열려있는지 닫혀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 장소에 여러 명이 비슷한 신체 감각을 공유하고 있고, 내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도 나도’를 확인하며 한 명의 청자는 다수의 관객이 된다.

관객을 위한 장소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플로어 혹은 댄스플로어는 사운드를 기반으로 청자와 또 다른 청자가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인 클럽이나 잘 갖추어진 무대만이 효과적이지는 않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전 세계를 휩쓴 레이브 이벤트는 창고나 폐건물 같은 공간에서 불법적이고 임시적인 형식으로 자주 벌어졌고, 영국의 흑인 이민 노동자들은 매주 한 집에 모여 레게 음악을 들으며 파티를 하기도 했다. 댄스 플로어는 매우 유동적으로 이동하는 장소이며, 플로어의 자격 요건은 함께 공유하는 장소이다. 이 요건은 한 집단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간단한 예를 살펴보자. 


 

공감2

1970~80년대는 ‘전자음’이 혁신적으로 음악에 등장한 시기이다. 롤랜드와 같은 전자 악기사들은 빠르게 다양한 종류의 전자 악기들을 출시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동시에 경제 불황을 겪으며 대규모 실직과 같은 우울한 상황에 놓였던 디트로이트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리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사운드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동차 공장의 기계적인 사운드가 테크노의 중심 요소인 전자 드럼머신의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사운드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전자 드럼머신은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박자로 드럼 패턴을 만들고 재생시킬 수 있다. 물론 내장된 사운드의 기반은 실제 드럼 소리와 유사하게 디자인된 전자음이거나 실물 드럼의 디지털 녹음이었지만, 작곡가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계 안에서 다양한 효과들을 이용해 드럼을 벗어난 드럼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딱딱하고 규칙적인 비트가 큰 변주 없이 이어지고, 멜로디라인은 아예 없거나 가끔 짧고 네거티브한 느낌의 전자 멜로디 몇 마디가 반복되었다. 새로운 전자음악의 시작에 디트로이트의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곧 ‘테크노’의 단순한 박자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사도 없었고 감정적 고조를 불러일으키는 멜로디도 없었지만, 그만큼 관객들은 끊임없이 4/4박자로 반복되는 전자음에 본인의 시간을 손쉽게 맡길 수 있었다.


 

공공2

테크노가 사람들에 의해 전 세계로 이동하면서, 테크노 붐은 사실 디트로이트보다 영국과 독일에서 상대적으로 더 크게 일어났다. 실제로 당시 독일은 전자음악이 태동하고 있던 나라였고 테크노가 성장하고 퍼지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테크노는 은밀하게 스며들었고, 이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베를린의 여러 폐공간에는 테크노를 즐기러 동독과 서독의 젊은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들었다. 동독과 서독의 분단 기간은 45년이었지만, 테크노가 이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결합하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음악 아래 하나 되는 우리’ 같은 이야기이다. 이는 굉장히 거시적인 관점이며, 실제로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한 사운드와 음악이 공동의 플로어를 형성한 곳에서 변화의 흐름이 발생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한 번도 댄스플로어 위에서 개인의 신체를 넘어선 공동의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강제로 공공의 영역에서 추방되었다.

 

‘테크노 바이킹(Techno Viking)’이라는 영상은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밈(meme)이다. 마티아스 프리치(Matthias Fritsch)라는 예술가가 촬영하여 2001년 유튜브에 업로드함으로써 유명해진 영상으로, 2000년 베를린의 ‘퍼크 퍼레이드(Fuck Parade)’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길 위를 울려 퍼지는 강한 테크노 비트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는 여성에게 한 남성이 취한 듯 달려들어 추행하고 사라지려는 찰나, 마치 바이킹과 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남성이 그를 낚아채 제압한다. 추행한 남성을 밀쳐내고 그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지만 ‘바이킹’은 끝까지 그를 주시하며 멀리 걸어가도록 위압적인 몸짓을 한다. 그리고 조금 뒤 ‘바이킹’은  이어지는 영상 내내 길을 걸으며 신나는 테크노 음악에 무아지경으로 춤을 춘다.

이 4분 남짓의 짧은 비디오에서 ‘테크노 바이킹’의 강렬한 외모와 제스쳐, 그리고 정의로운 듯한 행동과 영상 내내 흘러나오는 테크노 음악은 댄스 음악을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의 밈이 되기에 충분했다. (‘테크노바이킹은 위압적인 외모와 힘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정의를 아는 멋진 미지의 남자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을 제압하고 음악을 즐길 수 있을 때, 누군가는 음악을 즐기며 추행당한다는 사실은 금방 잊혀진다. 사운드가 다수의 사람이 가진 기초적인 감각을 자극할 때, 신체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등한 감각을 느낄 자유를 박탈당한다. 함께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 되면서, 나의 몸은 공동의 영역에서 튕겨 나온다.


 

공감3

나는 이 음악을 느낀다. 

너는 이 음악을 느낀다.


 

공유3

나는 이 음악에 춤을 춘다.

너도 이 음악에 춤을 춘다.


 

공공?

나는 너와 이 음악에 춤을 출 것이다. 

너는 나를 추행 할 것이다.

 

이러한 예상 밖의 추방은 관객과 관객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와 관객,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사이에서도 (당연하게도) 일어난다. ‘음악 아래 하나’와 같은 말은 완전한 이상이거나 완전한 기만이다. 많은 사람은 공간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기도 한다. 전문적인 댄스 플로어를 디자인하는 많은 공간 디자이너들에게 그러한 요청은 빈번하다. 하지만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분리한다고 해도, 사각지대가 없는 공간을 만들어도 그것은 결과를 알 수 없는 베팅이다.

모두에게 공공이 보장되지 못한다면 어떤 공감도 교환 불가능하다. 결국 이 문제가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해 이루어지는 문제라면, 우리는 순서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공감-공유-공공이 아니라 공공-공유-공감 혹은 공공-공감-공유의 형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 해결책은 어떤 형식이 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영국의 흑인 공동체가 아프리카로의 회귀를 기원하며 레게를, 퀴어 커뮤니티가 하우스 음악에서 보깅을 이끌어 냇 듯, 사운드-공공의 방향이 아닌 공공-사운드로의 상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운드가 새로운 언어가 되는 상상을 한다면, 그 새로운 언어가 어떤 공동체로부터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상상도 수반되어야 한다.

코딩도 언어학도 단순히 해당 언어를 익히는 데에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수정되며 대화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반영하고 우리는 그를 통해 상대방과 공감한다. 결국 언어의 발생과 그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공감을 향한 적극적인 변화이며, 이는 동시에 새로운 감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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